을사오적이자 친일파 이완용, 민족의 반역자로서의 인생
이완용, 성장과정부터 관직 진출, 그리고 친일파로의 변신까지
이완용(李完用)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생애는 성장과 관직 진출, 그리고 친일파로의 급격한 변신으로 요약됩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성장과정, 관직 진출 과정, 친미개화파로의 활동, 친일파로의 변신, 그리고 일제 강점기 동안의 친일 활동과 그에 대한 평가까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장과 초기 관직 진출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으로, 아버지는 이석준입니다. 어린 시절, 10세 때 대원군 집권 시기 호조판서를 지낸 판중추부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정치적 경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자 입양은 이완용이 이후의 정치적 발돋움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882년(고종 19년), 이완용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시험인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승지와 주서를 거쳐 규장각대교, 검교, 홍문관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직, 의정부검상, 해방영군사마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육과 외교관으로의 첫걸음
1886년, 이완용은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로, 헐버트, 길모어, 번커 등 미국에서 초빙한 3명의 교사가 역사, 지리, 만국공법, 정치학, 자연과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완용은 이러한 교육을 통해 외국과의 교류와 신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양반관료로서 과감하게 신학문 습득에 나섰습니다.
1887년, 이완용은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참찬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갑신정변 진압 이후 청국의 국정 간섭을 견제하고 자주국으로서의 외교적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국의 허락 없이 차관협상을 진행한 박정양이 소환당하면서 이완용은 서리공사로 임명되었고, 1888년 5월 병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승정원동부승지, 이조참의, 외무참의, 전보국회판 등을 거치며 다양한 관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같은 해 다시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미국에 갔으며,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 귀국하였습니다. 영어교육을 받고 미국 주재 외교관이 된 이완용은 친미개화파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미국 사절단을 안내한 알렌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친미개화파로의 활동
미국에서 돌아온 이완용은 고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친청파 중심의 정부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관직을 스스로 사직하였습니다. 대신, 시강원검교사서, 승정원승지로서 조용히 활동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친청파 정권이 몰락하고 갑오정권이 들어서자, 이완용은 다시 요직에 발탁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초기에는 박영효 등 친일개화파의 독주에 밀려 활발히 활동하지 못하였으나, 1895년 박정양 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으로서 친미개화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이완용은 친러파의 중심인물인 이범진(李範晉)과 손을 잡고 친미, 친러 연합세력인 ‘정동파(貞洞派)’를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 이완용은 청을 대신한 일본의 국정 간섭을 막고,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 아래 고종 중심의 개혁정권을 구축하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학부대신 재임 중, 근대적 초등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소학교령(小學校令)을 제정하고, 보통교육을 담당할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개정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학문기관이었던 성균관을 개혁하여 각국의 지리, 수학 등 근대 교과목을 도입하는 등 온건 개화파의 입장에서 근대 교육을 위한 개혁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발생하며 이완용은 실각하게 되었습니다. 갑오내각 내 반일친미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을미사변 발발과 동시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친일파로의 변신과 한일 병합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이완용은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임시서리로 다시 정권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친미, 친러개화파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심상훈, 신기선 등 보수파 대신을 기용하자,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의 창설을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1896년 7월 2일,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을 위해 관민합작으로 독립협회를 설립하자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완용의 연설은 '조선인이 합심하여 미국과 같은 세계에 부강한 나라로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자 이완용은 반러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군대가 왕궁을 호위하고 군사교관,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등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은 친러파의 독주를 견제하고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러시아 군사교관 고용에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완용을 내각에서 몰아내려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결국 고종은 이완용을 외부대신에서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외부대신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전임되었지만, 1897년 9월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며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이완용은 친일파로 급격히 변신하였습니다. 그는 과거 배일(排日)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일본의 승리와 시세의 추이에 따른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정계에 복귀한 이완용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친일파로서의 입지를 강화하였습니다. 그의 찬성 논리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한국 진출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며, 따라서 비교적 관대한 조치인 외교권 이양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이 가장 신뢰하는 친일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친일내각의 수반이 되어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문제 삼은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요구하자,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여 고종의 양위를 이끌어냈고, 사법권, 경찰권의 이양과 군대 해산을 담은 ‘정미7조약’ 체결에도 앞장섰습니다. 또한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이완용은 3일간 춤과 노래를 금지시키고 한국정부 대표로서 중국 다롄까지 가서 조문하는 등 친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활동과 평가
이완용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앞서 병합 청원과 합병 조약 체결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우익세력 및 군부와 공모한 일진회가 합방을 청원하는 대국민선언서를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국민연설회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일본정부에 자신의 병합 구상을 담은 합방안을 제출하였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가결시킨 이완용은 한일병합전권위원으로서 통감 데라우치를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 위치에 있었지만, 주권 박탈 과정을 앞장서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완용은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퇴직금, 특별은사금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중추원 부의장,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등 다양한 친일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친일 귀족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3·1운동에 대해서도 이완용은 3차례의 경고문을 발표하여, 운동을 '조선인의 경고망동을 엄중히 취체해야 하며, 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일제 식민 통치당국보다도 더 강력하게 3·1운동을 비난한 것으로, 그의 친일 의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평가와 유산
이완용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증오받는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한일 병합 조약 체결과 친일 활동은 조선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타는 등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그는 이재명의 칼에 저격당하여 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후에도 친일 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1926년 2월 옥인동 자택에서 사망한 그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직접 장의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일제에 의해 특별히 대우받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기록영화로 촬영될 정도로 일본천황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일본 최고 훈장인 국화대훈장을 수여받아 일본이 인정하는 강제병합의 최대 수훈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완용을 누구보다도 증오하였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의 논설은 그의 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을 남겼습니다.
"그 괴로운 갚음은 영원한 진실임을 오늘 이 마당에서야 깨닫지 못하였스랴.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앙탈하든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이 발언은 이완용의 행위를 극도로 비난하며, 그의 죽음이 마침내 조선민족에게 공정한 처벌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완용의 생애가 주는 교훈
이완용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의 선택과 행동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성장과 관직 진출, 친미개화파로의 활동, 그리고 친일파로의 급격한 변신은 한국사의 복잡한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그의 행보는 당시의 정치적, 외교적 상황과 개인의 선택이 어떻게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의 행적은 분명히 한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고 미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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