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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목숨을 구한 신숭겸, 고려 초기 의로운 장수

마스터지 2025. 1. 19.

고려 초기의 영웅, 신숭겸 장수 이야기

 

고려의 건국 초기, 수많은 장수들이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숭겸(申崇謙)은 그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오늘날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는 인물입니다. 신숭겸은 927년, 즉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지 10년 만에 전사한 장수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신숭겸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신숭겸의 출신과 초기 생애


신숭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그의 초명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光海州), 현재의 춘천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예와 용맹을 겸비한 그는 광해주의 조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춘천에는 그의 묘소가 존재합니다. 또한, 전라도 곡성현에서도 신숭겸이 곡성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출신지가 약간의 혼동을 주기도 합니다. 황해도 평산도호부 지역 편에서는 그가 원래 곡성 출신이지만, 태조 왕건에 의해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숭겸과 태조 왕건의 만남


신숭겸의 젊은 시절 활동에 대한 기록은 적지만, 『고려사절요』에는 그가 태조 왕건과 함께 정벌에 나가 공을 세운 장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왕건이 직접 전장에 나가던 시기와 고려 건국 이전에 활약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숭겸은 궁예의 휘하에 있던 송악 지역의 유력 세력이었던 왕건 집안에 합류하게 되며, 그 후 왕건을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왕건 옹립 사건


918년(태조 즉위) 6월, 궁예 휘하의 주요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옹립하여 새 왕으로 모시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궁예는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왕건은 새로운 나라 고려를 세우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충성의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승자가 기록한 역사인 만큼 쿠데타에 가까운 정황도 존재합니다. 신숭겸을 포함한 네 장수는 1등 공신으로 책봉받으며 금, 은, 비단을 하사받았습니다.

 

활쏘기 일화


신숭겸이 활에 능한 장수였다는 이야기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일화에서 비롯됩니다. 태조 왕건이 평산에서 사냥을 나간 중,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누가 활로 쏘겠냐고 물었을 때 신숭겸이 자원하여 정확하게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는 그의 정확한 활 솜씨와 왕건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후백제와의 전투, 공산 전투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927년(태조 10년) 9월에는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신라로 침공하여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키는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태조는 1만의 병력을 이끌고 공산(公山)에서 후백제군을 공격하게 되지만, 병력 운용의 무리와 후백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고려군은 대패하게 됩니다.

 

KBS태조 왕건에서 신숭겸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산 전투와 신숭겸의 희생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과 김락(金樂)은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다른 군사들도 패배하여 도망쳤습니다. 왕건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이 패배로 인해 한동안 후백제에게 열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그들의 유가족에게 벼슬을 내리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습니다. 또한, 신숭겸은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높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공산전투(우리역사넷)

신숭겸의 영웅적인 최후


신숭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외에도 후대에 편찬된 행장 등에서 보다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신숭겸은 태조를 피신시킨 뒤 자신이 태조인 것처럼 행동하며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후백제군은 그를 태조로 착각하고 그의 머리를 잘라 돌아갔으며, 시신을 찾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의 시신을 찾아내어 제사를 올리고 춘천에 묘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숭겸의 충성과 용맹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줍니다.

대구 파군재삼거리 신숭겸동상

팔관회와 신숭겸의 유산


12세기 예종 때, 국왕은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락을 기리는 우상을 보고 감탄하며 '도이장가'라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이는 두 장수를 애도하는 노래로, 행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로도 팔관회에서 두 장수를 기리는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신숭겸을 기리는 다양한 공간들이 조성되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습니다.

 

신숭겸의 유산과 추모


신숭겸에 대한 추념은 고려 초기부터 이어져 왔으며, 그의 출신지와 관련된 여러 사찰과 묘역에서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곡성에는 양덕사(陽德祠), 춘천에는 신숭겸의 묘역과 도포서원(道浦書院)이 있으며, 대구광역시에는 표충사(表忠祠), 평산에는 태사사(太師祠)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신숭겸의 용맹함과 충성을 기리며, 그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신숭겸은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수로,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한민족의 정신과 가치관을 상징하는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신숭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며,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신숭겸은 고려 초기의 중요한 장수로, 그의 헌신과 용맹함은 고려의 건국과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장수들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숭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의 유산은 다양한 형태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신숭겸과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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