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보다 귀했던 신라의 유리구슬과 유리그릇, 어떻게 생겨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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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투명하지만, 황금보다 귀했던 유리의 이야기: 신라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의 찬란한 역사
우리가 흔히 보는 유리는 단순한 일상 소품이지만, 1,500년 전 신라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부와 권력, 국제적 교류의 상징이었습니다. 황금보다 귀하다고 여겨졌던 유리, 특히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은 신라 고분에서 대거 출토되며, 그 찬란한 빛과 예술성, 그리고 유통 경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오늘은 고대 유리의 비밀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유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유리는 흔히 ‘모래와 불의 예술’로 불립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주재료는 산화규소(SiO₂, 실리카)이며 여기에 용융점을 낮추는 ‘융제(재, 내트론)’와, 융제의 풍화를 막는 ‘안정제(산화칼슘 등)’, 색을 내기 위한 ‘착색제(산화코발트 등)’를 섞어 고온에서 녹여 만듭니다.
최초의 유리는 약 4,500년 전 이집트 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등장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에서 대롱불기(Blowpipe) 기술이 개발되며 유리 생산에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로마 유리는 ‘로만 글라스(Roman Glass)’라고 불리며 유럽과 아시아로 퍼졌고, 신라에도 이 유리문화가 전해졌습니다.
황남대총 유리병의 비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의 유리문화 시작
우리나라에는 기원전 2세기경 중국의 철기문화와 함께 유리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유리는 납-바륨 유리였으며 이후 포타쉬 유리와 소다 유리가 유입되며 다양한 유리제품이 제작되었습니다. 사찰이나 귀족 중심으로 유리 사용이 이어졌고, 신라시대에는 정교하고 다채로운 유리제품이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며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유리보다 더 아름다운, 오색영롱한 유리구슬
유리구슬은 신라시대 무덤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리제품입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는 무려 4만 점이 넘는 유리구슬이 출토되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30,700여 점이 나왔습니다. 신라 유리구슬은 소다유리 계통으로, 대롱불기 기법을 사용해 효율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형태는 둥근 것, 장구 모양, 연리문(비틀린 색줄무늬), 상감 유리구슬(모자이크 형태)까지 다양했습니다. 또한 금박과 은박을 넣은 중층유리구슬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동남아와 서아시아, 지중해 지역에서 확인된 고급 기술로 국제교류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유리구슬의 색과 아름다움
- 색상: 청색, 녹색, 황색, 주황색, 갈색, 흰색(풍화된 상태)
- 특이현상: 은화현상(iridescence) – 시간의 풍화로 인해 무지갯빛을 내는 현상

유리그릇, 황금보다 귀한 위신재
신라에서 유리그릇은 황금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 무덤에서만 소량이 출토되며, 하나의 무덤에서 1~2점이 고작일 정도로 희귀합니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무려 8점이 한꺼번에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형태는 완(그릇), 잔, 봉황머리 유리병 등 다양하며, 투명하거나 청록색 계열의 유리가 많습니다. 유리 표면에는 금박, 유리띠, 청색 점무늬, 무늬띠(網目文)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제작 방법은 로마의 대롱불기 기법을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했으며, 이는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입증해 줍니다.

유리그릇은 어디서 왔을까?
- 로만글라스: 초기 유리그릇은 주로 로마에서 유입
-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 이후에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그릇도 유입
- 유통 경로: 초원길(草原路), 실크로드, 바닷길(해상 실크로드)
- 출토지: 황남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 신라 대형 적석목곽분
신라의 유리그릇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리그릇 제작기법 요약
제작기법 | 설명 |
코어 기법 | 진흙 심을 만들고 유리로 덮은 뒤 심 제거 |
거푸집 | 주형 틀에 유리를 부어 성형 |
열수하법 | 유리판을 가열해 중력으로 늘림 |
대롱불기 | 속이 빈 대롱으로 유리 불어 형태 만듦 (로마 기법) |
유리, 그 자체가 ‘국제 무역의 상징’
유리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고대 세계를 잇는 무역과 교류의 증거였습니다. 신라에서 발견된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로마, 인도네시아까지 다양한 지역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것이 바로 신라가 동아시아 국제 네트워크의 중요한 일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빛과 바람, 그리고 시간을 담은 유리의 예술
유리는 그 투명함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신라의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은 단지 장식품이 아닌, 시대와 문명을 잇는 고리였고, 문화와 기술의 교류가 만들어낸 정교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유리를 통해 우리는 신라 사람들의 미의식과 세계관, 그리고 국제적 감각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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